경제학은 간단히 말한다면 사람들의 의식주를 마련하기 위한 물질생활을 주어진 자연적, 사회적 조건 가운데서 합리적 지속적으로, 최대한 만족스럽게 영위해 가는 것을 보장해 주는 사람들의 관습과 사고방식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현대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은 분업 질서에 따라 직업 활동을 하여 화폐로 그 대가를 받아서 시장에서 삶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여 소비하게 된다. ‘생태경제학’이라는 것은 생태적 위기에 대한 각성에서 나온 사람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 혹은 대안을 제시하는 생각을, 경제학이라는 기존의 학문적인 틀과 개념들을 빌려서 진술한 것이다. 그것 자체가 과학적인 방법론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자연적 사회적인 조건의 변화를 관찰영역에 집어넣어 사람들의 물질생활의 행태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과학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인간 생태학 또는 인구학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생태경제학은 그런 엄밀한 과학이라기보다는 생태적 각성에서 출발한 경제사상에 가깝다.
생태적인 삶은 자연생태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비폭력적으로 생활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관찰된 사람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물론 아닐 것이다. 요컨대 생태경제학은 생태적인 각성과 이에 따른 새로운 인식과 사상이고 이것이 사람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을 생태적 삶이라고 생각해서 위와 같은 제목이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중국의 왕양명 선생은 앎과 삶이란 그렇게 선후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행동은 앎의 공부이고, 앎은 행동의 시작이요, 행동은 앎의 완성이다”(行是知之功夫。知是行之始,行是知之成) 이런 차원에서 생태경제학은 어떤 외국에서 들어온 책자나 누구의 강연이나 인터넷에서 보고 듣고 해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관찰과 그 관찰이 가져오는 마음의 동요에서 출발한다.
생태적 삶도 나의 삶의 방식이 나 자신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사물들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 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 관계가 비폭력적이고 비착취적인 것이어야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나의 몸을 혹사시켜 나의 외적인 성과를 높이려고 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 휩쓸려 밤을 지새며 일에 매달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나를 위해 더욱 더 많고 좋은 것을 해 달라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요구하고 결국 착취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나 자신을 쥐어짜고 이웃을 쥐어짜고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낭비하여 써 버리고 그 대가로 내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인정받고 생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내가 모든 존재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이러한 나 자신에 대한 관찰은 직간접으로 타인에 대한 관찰에서 더욱 많은 실마리를 얻게 되어 나만의 생태경제학으로 발달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내가 나 자신의 몸과 정신 등으로 이루어진 생명을 착취하고 남용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 중요한 목표와 가치를 위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도시 속에서의 나 자신의 확실한 생존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꿈속에서 살아왔다. 나 자신의 행태에 대한 관찰은 치명적인 문화적 환경에 대한 관찰로 이어진다. 그런 꿈을 꾸도록 가족에 헌신하는 어머니를 배우도록, 세상을 위해 몸을 바친 예수를 배우도록, 어떤 대의에 몸 바친 투사들을 배우도록, 그렇게 치열하게 살도록 세뇌 교육을 받으며 지금과 같은 종교사회 문화를 이루어왔다. 나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도록 치열하게 살도록 독려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런 종교는 과연 온당한 것인가? 과연 그런 예수가 정말 어디 있었다는 것인가? 인간에게 그런 강박관념을 심어준 것은 문자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제국문명이고 이 제국문명이 기후위기를 비롯한 생태계 파괴, 그밖에 문명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적인 피로와 질병상태를 가져왔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가진다.
이런 문화적 강박에 대해 막스 슈티르너는 이렇게 반발한다: “신과 인류는 자기들의 대의를 자기들 말고 다른 어느 것에도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대의를 마찬가지로 나 자신, 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전부, 유일자인 나에게 둔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인정을 받고 그만하면 잘 했다는 칭찬을 받으면 되는 것이지 누구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쓰면서 반쯤 노예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고갈시키고 주의 사람들에게 계속 요구하는 사람이 되고 모든 물건들, 사람들 위에 폭군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나의 건강, 나의 온전한 상태만큼 기본이 되고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효(孝)는 이런 맥락에서 나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온전성을 지키고, 부모로 대표되는 나의 주변사람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돌봄으로써 이런 나 자신과 타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와 노예화에 저항하는 위대한 생명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이 피곤하고 짜증이 남을 느낀다면 그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것들에 해로운 영향을 주게 되고 파괴적인 충동으로 이어져서 많은 에너지의 낭비와 불필요한 물자의 소비를 유발하게 됨을 깨닫게 되는 것이 생태경제학이다.
그런 피곤하고 짜증이 나 있는 불건강한 상태는 어떠한 정의, 평화, 생명의 대의에 기여하는 수단이나 희생제물이 될 수가 없다. 그러한 불건강한 환경에 처하여 나 자신을 이에 적응하느라 애쓰게 하지 말고 평화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관계에 직접 저항하거나 아니면 그런 관계에서 떠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생태경제학에 따른 생태적 삶의 실천이다.
그러면 이런 비폭력적인 삶의 방식에서 지금까지 인류가 자랑스럽게 쌓아놓은 문명의 성과물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화려한 모습이 그냥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고귀한 문화적 활동을 자극하는 정신적인 동력은 게으른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강압과 강박관념이 아니면 어디서 나올 수 있느냐고 하는 항변도 있을 수 있다. 사회와 경제에서는 생산성이 높은 사람을 환영하고 어느 단체에서나 참신한 아이디어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구체화하는 미친 듯이 일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활동의 의욕과 에너지가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샘솟을 때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경제적 압박이나 권력에 의한 압박, 생존을 위한 강박관념으로 그렇게 한다면 이는 나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되는 길이 아닐까? 내가 속한 조직체에서 사람을 시간에 쫓기게 만들고 서두르고 밥을 거르고 잠을 못 자게 만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만드는 관행들이 만연해 있을 때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는 그 속에서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생명에 가해지는 고통으로 깨달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의 팔레스티나에서의 전쟁, 군비확충과 무기수출 이런 반평화적 반생명적인 모습들은 나 자신의 온전한 상태에 대한 질문에서 비로소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다.
이런 개인적인 질문과 각성들은 자본주의 도시문명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른 시기이건 늦은 시기이건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거의 반드시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개인의 변화로 그 다음에는 사회와 문명 자체의 변화로 이어지는 힘으로 합쳐지려면 이 길을 안내해 주는 지도가 필요하다. 지구상의 자연과 역사의 진행과정과 진행방향에 대해 작용하는 힘들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이른바 생태경제학이 될 수도 있겠다.
생태경제학이라는 앎과 생태적 삶이라는 행함은 지구상에서 인간들의 행태가 변화해 가는 과정의 단면들이고 미약하기는 하지만 이런 모습은 인구집단이 아직 제국문명이라는 절망적인 병으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할 가망이 없는 상태는 아님을 암시해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병이 든 인구집단이란 몸에서 내가 건강한 세포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 건강한 세포가 어떤 기능을 하면서 비슷한 세포들을 증식시킬 것인지 진지하게 모색하면서 실천하는 생태적 삶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면서 길이 만들어지고 지구에 종말이 올 때까지도 생명을 보듬는 인간다운 모습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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