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 | 박정인 교수 |
---|---|
제목 | [인권과 세상 6] 악의 평범성 |
등록일 | 2019-11-26 |
조회수 | 4508 |
[인권과 세상 6] 악의 평범성 박정인(해인예술법연구소 소장) 전쟁이 막 끝난 1960년대의 한국과 오늘날의 한국은 분명 다르다. 그래서 이젠 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편 아니면 저기 편”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명확하게 갈리는 것은 아니다. 즉, 악이라고 생각해 온 측면의 이야기를 함께 듣게 되면서 다양한 욕망과 정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디까지나 “우리 편 아니면 저기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순진하기보다는 무지하다는 말이 맞다. 지금은 스토리상 어느 편에 서는가보다는 왜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얻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른바 386 세대라고 부르는 자들이 사회적으로 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들 아래의 세대와 386의 자녀 세대는 386 세대에게서 이를 확보해 오지 않으면 그 지위는 영원히 가져올 수 없다. 이것은 386 세대 그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다른 세대 시민들의 연대와 소통이 절실한 이유가 되기도 하고 이 땅 아래 모든 자들에게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시민들의 연대성을 위한 비판과 성찰을 증가시키기 위하여는 기득권이 된 세대에게서 지위를 찾아오는 목적도 중요하지만 시민으로서 교육을 통해 이러한 과정은 정당한 권리를 통해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정치 사상가이다. 그녀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담긴 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았으나 야스퍼스의 ‘현대의 정신적 상황’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듯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비판하고 성찰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유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악이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러나 사유의 내용과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자신의 스승 하이데거의 표현을 다수 인용하였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고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의 표지가 되는데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아렌트는 위의 하이데거의 논리에 이어 결국 “어떠한 인간의 삶도 자연 속 광야에서 살아가는 은둔자의 삶조차도 다른 인간의 현존을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줄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며 인간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존재론을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은 타인의 삶과 죽음에 우리는 일정 부분 책임이 있으며, 무언가 행위한다는 것은 탄생성의 조건에 대해 인간적인 응답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머니가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날에 단 한 차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생명은 스스로 자신으로 하여금 재탄생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보편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르트르는 헤겔의 이성은 현실적인 것에 비하여 장 프랑수아 료타르는 현실적인 것이 항상 이성적인 것은 아니며 결국 사유의 양식인 상식으로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여야 하기에 홀로코스트는 현실적이나 이성적이지 않다고 하였다. 아렌트는 전세계 부의 대부분을 유대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유독한 존재라는 편견 아래 유럽에서 다른 곳으로의 유대인 이주정책을 천명했던 시기,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없고 사회적 탈출구가 없는 존재에게 정체성을 벗기는 방법을 오직 죽음으로 제시한 홀로코스트는 많은 사람들의 악의 평범성에 기초된 행위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아이히만이 히틀러의 지시로 저지른 흉악한 악행이 업무상 군인의 행위로서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오랜 기간 느껴졌던 것은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사유의 불능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소통이란 차이 때문에 있는 것이고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도 없고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도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 모두가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 차이점을 사유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악이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사유도 그것을 기반으로 한 의지도, 판단도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리면 의지를 가질 능력도 사라지고 행위도 사라지며 행위 중에서 도덕적인 행위를 할 확률도 줄어든다.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를 인정하되 보편적으로 서로 종을 지키겠다는 보편적 함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혼돈과 질서를 사유하는 분별력을 기초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실천이성비판’에서와 같이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라고 하면서 당시의 악법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고 권력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의 최상의 재능이 상관들에 의해 오용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좋은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운이며 자신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아렌트는 “8000만 독일인이 피고처럼 행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3가지 무능함 즉, 말하기의 무능함, 생각의 무능함,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함을 주장하면서 인류는 생명 그 자체만으로도 인위적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며, 인간은 생명을 통해 모든 다른 살아있는 유기체와 관계를 맺기 때문이라고 “인간의 조건”에서 쓰고 있다. 더 나아가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이타주의, 타자를 향하는 윤리,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나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존재 윤리가 기반이 될 때 비로소 인간 사유의 미래, 철학의 희망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름을 인정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한단계 조화로움 속에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이라고 하는 것이 끔찍한 외연으로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날이 기술과 상품과 언론과 서비스는 점점 더 우리를 획일적으로 만들고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사유 없는 복종과 지지가 폭력을 불러왔던 시기를 떠올리며 우리는 폭력이 만드는 차이(다름)의 삭제에 대해 묵상하여야 한다. 이것은 결국 우리 생명을 위협하는 값비싼 대가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사라지는 자신을 항상 경계하며 단순한 순종과 지지는 폭력이나 분쟁,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사유 없이 수용해버리던 과거의 아이히만,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을 인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미 세계대전을 보았고 그 결과 배상책임국가가 여전히 세계의 패권 아래 놓여있는 현재에 “어떤 특정한 범죄가 처음으로 발생한다면 그 범죄의 재출현은 최초의 출현보다 훨씬 가능성이 높고 실패를 벗어날 확률이 높다”는 이 책의 메시지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것은 악에 물들어가는 나, 세상에 자꾸만 길들여져 가는 나를 거울앞에 발견하기 때문이다. |
이전글 | [수필] 진보의 소비 |
---|---|
다음글 | [인권과 세상 5] 운명에 대한 모두의 배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