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 | 박정인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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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인권과 세상 3] 아픈사람의 인권에 대하여 |
등록일 | 2019-10-30 |
조회수 | 4136 |
아픈 사람의 인권에 대하여 박정인 소장 (해인예술법연구소 소장, 단국대 IT법학협동과정 교수, 저작권보호심의위원회 위원, 여론집중도조사위원회 위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라고 하지만 병원제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아픈 사람, 현재 고통속에 있는 사람의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현대 의학은 정상성이라는 기준으로 질병을 판단하고 통계적 수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을 표본집단으로 필요한 수치를 수집하고 이 수치의 평균을 낸 다음, 이를 중심으로 자료들이 얼마나 흩어져 있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즉, 정규분포곡선에서 상위 5%와 하위5%에 해당되면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질병상태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질병이라는 통지를 하게 되고 삶은 의학이라는 학문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분명 질병도 그 사람의 한 부분인데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신체적 규범인데 혈압의 경우 생명을 유지하고 제대로 살아가려면 정상수치로 되는 혈압상태가 요구된다는 것인데 그 흔하다는 규범이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는 규범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평균 맥박수가 70 이하이지만 전혀 건강에 문제를 느끼고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정상이냐 아니냐의 구분에 대해 획일적인 의학이 말하는 질병이 나의 신체규범에 부합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하다는 것이 곧 내 삶에 적합한 규범은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맥박수가 70이하라 비정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규범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질병 역시 한 사람이 겪어나가야 하는 정상성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 없는 상태를 가지키지도 않고 질병을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에게서 질병을 소거하여야 한다고 생각할 때 무리한 신체의 압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삶이 보내는 신호들을 읽다가 질병을 통지받기도 합니다. 넘치는 의학정보의 세례로 타자가 욕망하는 욕망으로서 자신의 삶에 무엇이 이로운지 생각하는 진짜 이기주의에 대한 성찰을 내가 아닌 병원에 맡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병원에서 의사의 환자를 낫게 하겠다는 인정 욕망은 자본주의 중심의 병원상품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춘은 예찬받아 마땅하지만 늙는 자연스러움이 청춘에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만 한다는 노이로제에서 벗어나 매일 사용되고 닳아지는 방식으로 우리의 신체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로병사는 모든 생명체가 시간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이 가을이 겨울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은 모습에서 건장한 신체로, 쪼글쪼글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동안 삶은 낡아가는 기계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힐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남들이 청춘에 집착하니 청춘을 같이 갈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청춘에 매달리는 우리 마음을 제대로 돌아볼 때 기계는 시간으로 낡아가지만 삶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픔은 새로운 세계를 깨어나게 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질문을 인생에 던지게 해주며 질문은 삶에게 목적성을 만들어주는 스승입니다. 우리도 희망이 0이 된 순간을 떠올리며 병원제도의 무력함을 생각합니다. 수술을 받고 자신의 몸을 타자의 결정에 내맡기고 화학요법을 거듭하며 끝없이 삶을 희망하는 인생과 수술과 치료를 거부하고 그 암이라는 것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을 계속해 나가다나가 고통과 한몸이 되어 일상을 이어나가다 죽는 인생 그 두 인생 사이에 진정한 희망과 절망은 무엇일까요. 병원제도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선택 아래에 놓여 있어야 하고 강요하고 판단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잘 죽어가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잘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의미입니다. 의학은 우리 인간 삶의 능력을 빼앗지 말고 치료가 모든 고통을 제거하는 근원이라는 이미지 연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술만이 고통을 처리하는 수단이 아니라 진통제 replicas panerai 권하는 사회야말로 삶을 왜곡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의 고통과 병은 삶과 분리된 독립된 실체가 아닙니다. 스스로 병원놀이의 객체가 된다는 관점만으로는 인권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고통을 통과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로만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며 삶은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인간에게 자신의 삶에서 고통과 질병을 다루는 능력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이나 질병에 있어서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물건들처럼 환자가 되어 병원에서 정해주는 치료경로들을 옮겨 다닐 때 의학은 인간이 아니라 질병을 중심으로 분류하여 물건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굳이 의료분쟁에 있어 환자가 이길 수 없는 여러 통계나 얼마나 우리가 아프다 죽는지를 검토하는 통계나 각종 법적 권리를 들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두통만 와도 바로 약을 먹는 자신을 돌아보며 잠시 우리 몸의 자연균형을 믿으며 어떻게 아플 것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에게 병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어야만 환자의 인권에 대해 의학도 다시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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